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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읽을거리/사회 & 역사

[관찰] 고길동과 곽철용의 시대

by    2019. 10. 7.

인터넷에 널리 돌아다니는 포스터. 원작자 미상.

<타짜>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가 개봉하면서 13년 전의 캐릭터가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타짜>의 첫 영화에 등장하는 건달 두목 곽철용이다. 갑작스럽다. 배우 본인도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다. 신작 영화가 받아야 할 관심을, 지나간 영화의 한 인물이 한 몸에 받은 것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들은 곽철용이란 인물의 행동을 하나하나 재조명하며 그 대인배적인 면을 강조한다. 범죄자이지만 일종의 규율을 지키는 (듯 한) 모습과, 무례함도 포용하고 아군으로 포섭할 줄 아는 모습, 재치 있는 명대사들이 사람들이 곽철용을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허무한 쥬금

그런데 영화 속에서 곽철용의 역할은 주인공을 위한 소모품 같다. 그는 영화 전반부의 악역이다. 그러나 그는 연신 패배하고 실패한다. 주인공에게 "늑대가 어떻게 개 밑에 들어가겠냐"며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악연은 잊고 계속 동업을 제안한다. 결국에는 신뢰했던 주인공에게 배신당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가 죽고 나서야 영화의 주요 악역인 아귀가 등장한다. 그냥 어피타이저 역할만 하다가, 별다른 전환점도 없이 그냥 죽은 셈. 곽철용은 주인공 중심 서사의 희생자가 되었다.

주인공 중심 서사의 희생자(2)

곽철용의 재발굴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다른 캐릭터가 있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다. 고길동 역시 몇 년 전에 비슷한 느낌으로 떠오른 바 있다. 고길동은 평화로운 삶을 바랄 뿐인 아버지이자 회사원이다. 그는 둘리와 만난 후 매일같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다. 고길동이 둘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혀 비상식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둘리와 일행은 온갖 말썽을 일으키며 그의 인생을 휘청이게 만든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주목은 받지 못한다. 둘리의 시청자들은 둘리에게 자신을 투영해 본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고길동은 자꾸만 트집잡고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그가 당하는 갖가지 피해는 통쾌한 복수가 되고, 그가 겪는 수난은 화면 바깥으로 밀려나 잊힌다. 

 

마찬가지로 2006년에 <타짜>를 처음 보던 사람들은 주인공 "고니"의 시점에서 영화를 본다. 하찮았던 주인공 고니의 통쾌한 성공에 몰입하고, 다른 인물들은 보조적인 역할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박무석, 호구 그리고 곽철용까지 각각 그들만의 사정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자리에 선 관객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구, 혹은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조역이나 촉매일 뿐이다. <아기공룡 둘리>와 <타짜>에서 고길동과 곽철용은 모두 주인공의 폭주 하에 수난을 겪는 매력있는 캐릭터지만, 주인공의 입장에만 과몰입한 관객들에게 그들은 관심 밖이었다.

 

이 두 작품의 주요 관객은 누구였을까. 유치원 다니던 시절 <아기공룡 둘리>를 즐겨보며 자랐던 세대는, 10여년 후 중고등학생으로서 <타짜>를 본다. <아기공룡 둘리>는 원래부터 아동층을 타깃으로 만든 만화영화다. <아기공룡 둘리>의 관객들은 철저한 어린이의 관점에서 영화를 감상한다. 둘리와 일행은 어린이들이 열망하는 신나는 모험을 떠나며, 이에 방해되는 “상식적인” 어른 고길동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골탕 먹인다. 그리고 <타짜>같은 청불 영화만큼 청소년들의 관심을 끌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게 있을까. 방해꾼(늙은이)들을 하나씩 해치우며 성장해 멋지게 대박을 터뜨리는 주인공(젊은이)의 모습은, 학교 밖의 미래를 상상하는 중고생, 대학생에게 멋진 롤모델이 된다. 도박이 꿈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의 시선은 주인공에게 편중될 수밖에 없다. 

관객: 우왕 너무 므찌다

<아기공룡 둘리>와 <타짜>는 90년대 전후 출생자의 성장과 함께한다. 고길동과 곽철용의 재평가는 바로 이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90년대에 어린이로서 보았던 <아기공룡 둘리>를, 십 수년 후 되돌아보며 이전에 주목받지 못 했던 대인배적인 인물인 고길동을 발견한다. 마냥 둘리와 모험이 좋은 어린이의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으로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10년이 더 지나, 학생 때 보았던 <타짜>를 다시 보게 된다. 이 때는 몇 년간의 사회생활을 해 보며 더 많은 일들을 겪어본 시점이다. 원래 단순한 악역 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곽철용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재발견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어쩌면 막연한 자신감으로 몰입했던 주인공의 시점에서 벗어나, 각각의 인물의 동기와 성격을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고길동과 곽철용이 재평가된 때는, 각각 90년대에 태어난 한 세대가 어린이 티를 벗고, 사회에 진출했던 시점과 일치한다.

 

영화의 내용이 변하지 않아도, 관객이 경험하고 성장하면서 관점이 달라지고, 주목 받는 인물도 변화한다. 90년대에 출생한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아기공룡 둘리>와 <타짜>, 두 영화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다시 보는 둘리는 예전 같지 않았고, 10년이 지나 다시 보는 고니도 예전과는 달랐다. 어린이 관객들의 영웅 둘리, 청소년 관객들의 영웅 고니는 고길동과 곽철용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둘리와 고니의 시대는 가고 고길동과 곽철용의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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