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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읽을거리/사회 & 역사

[스크랩] 조선, ‘인구의 30–40%’가 노비인 사회

by    2019. 12. 20.

드라마 〈추노〉 / 출처: KBS2

전체 인구 460명 중 노비는 28명(6.1%)이었다. (문서의 작성 연대는 695년, 755년, 815년으로 견해가 나뉜다. 참고로 ‘삼국 통일’은 676년이고, ‘고려 건국’은 918년이다.) 통상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남북전쟁 이전 미국 흑인 노예의 경우, 노예 비중이 약 30–40%였다. 6.1%는 노예제 사회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비중이다(59쪽)
양 및 한국의 중세는 서양과 달랐다. ① 한국은 ‘중앙집권 국가’였다. ② 한국은 ‘관료제’가 발달했다. ③ 토지 자체를 수요한 게 아니라, 수확물을 걷을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收租權)을 지급했다. 이데올로기적 명분 수준에 불과했지만, 토지는 모두 ‘왕의 소유’였다(왕토 사상).
이는 오늘날, 독일, 일본과 같은 나라들이 지방자치제, 연방제, 강한 중소기업이 발달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반면 한국이 지방자지체, 연방제, 강한 중소기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서양은 ‘분권적 봉건제’로 인해, 중앙집권적인 국가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국가가 ‘경제통합’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이는 17세기 절대주의 국가(=절대왕정) 이후에나 가능했다.
15–17세기, 조선 시대 전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 영남, 호남의 남부 지방은 그 비율이 더 높았다. 노비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대량으로 발굴되는 호적 자료들 덕분이다. (‘호적’은 군역[軍役]을 부담시키기 위해 국가가 취합한 자료다.)
노비 유형은 크게 두 종류이다. 집 근처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노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물을 납부하는’ 노비가 있었다. 전자(前者)를 솔거노비+입역노비라고 했다. 후자(後者)를 외거노비+납공노비라고 했다. 솔거/외거는 ‘공간’에 따른 구분이고, 입역/납공 노비는 ‘역할’에 따른 구분이다.
노비 가격은 폭락하여 공정가격의 1/10에 불과한 10냥 전후가 된다. 18세기 노비제 감소의 원인은 첫째, 노비에게도 군역이 부과된다. 둘째, ‘영조’에 의해 추노(追奴) 행위가 제한된다. 셋째, ‘노비제’를 대체하는 소농경영에 기초한, 지주-소작제가 확대된다. 넷째, 1730년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어머니 쪽 신분을 따르도록 노비법이 완화된다. 이 역시 ‘영조’의 업적이다.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 ② 조선, ‘인구의 30–40%’가 노비인 사회

※ 「① ‘한국 경제사’에 입문해보자」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넷째, 한반도의 고대는 노예제 사회였을까? 우선 한반도 역사에서 있었던 것은 노비(奴婢)다. 남자 노비가 노(奴), 여자 노비가 비(婢)다. 고대 그리스는 ‘노예제 사회’였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노예제에 기반한 전사(戰士) 민주주의였다. 그리스의 ‘시민’은 정치적 주체이자 동시에 전쟁의 주체였다. 고대 한반도는 어땠을까? 고대 한반도가 노예제 사회였는지 여부를 따지려면, 노예의 개념과 노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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