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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읽을거리/인생 & 썰

[이야기] 고시원 생활

by    2019. 9. 27.

 

몇 년 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었다. 수중에는 고작 몇 십만 원 밖에 없었다. 나는 찜질방과 피시방을 전전하다가 고시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네이버 지도로 무작정 아무 데나 골라서 찾아갔다. 어느 번화가 외곽 대로변에 있는 낡은 건물 4층이었다. 광고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유리 문을 열자, 어둑어둑한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양옆으로 좁은 문들이 늘어서 있었고, "관리실"이라는 표지판 밑에 작은 미닫이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어 창문을 열어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창문 위에 붙어있는 A4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성펜으로 "용무 중 010-****-****" 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이 든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빈 방 25호 21호가 비어 있으니 들어가서 한 번 보라고 했다.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불을 켰다. 요즘은 보기 힘든 옛날식 형광등이 껌뻑거리며 켜졌다. 불을 켜도 어둑어둑했다. 에어컨 대신 방 천장에 선풍기가 하나 달려 있었다. 어릴 적 교실 천장에 달려있던 그런 모양이다. 양 팔을 벌리면 양쪽 벽에 닿고도 마는 너비에, 사람 키보다 조금 긴 길이의 방이다. 딱딱한 침대, 벽에 붙어있는 책상, 그리고 옷장 대신 쓸 봉 같은 것이 가구의 전부였다. 정말 작은 브라운관 티브이 하나와 비슷한 크기의 냉장고가 하나 있긴 했다. 21호는 창문이 없는 방이었고, 25호는 대로변이 보이는 꽤 큼지막한 창문이 있었다. 21호는 25만 원, 25호는 34만 원. 나는 돈을 더 써서 창문 있는 방에 들어가기로 했다.

고시원 생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화장실과 세탁기, 주방은 공용이었는데, 근사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못 쓰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샤워실 두 개와 세면대, 그리고 화장실 한 칸이 있었다. 낡긴 했지만, 지저분하거나 고장 난 것은 없었다. 주방은 일반 가정집의 주방같이 꾸며져 있었다. 큰 공용 냉장고 하나,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공용 식기들과 칼, 도마 따위가 있었고, 밥솥에는 밥이, 반찬통에는 김치와 계란이 항상 채워져 있었다.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 제공되는 셈이다. 김치볶음밥만 먹는다면 한 달에 30만 원만 쓰고 살 수도 있었다. 물론 중간에 포기했지만 말이다. 낡은 세탁기도 멀쩡하게 작동했다. 나중에 날씨가 더워지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중앙냉방식 에어컨도 있었다.

또 고시원에는 "총무"라 부르는, 원장 대신 관리와 청소를 맡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때 총무는 낮에는 호텔 주방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고시원 관리를 맡았었다. 총무 일은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밥을 앉히고, 자잘한 청소를 하고나면 방에서 쉬면 되었다. 그는 가끔 고시원 사람들을 불러모아 요리를 해 주기도 했다. 호텔에서 쓰고 남은 재료를 가져와 값싼 채소 같은 것들을 곁들이면 꽤나 근사한 요리가 만들어졌다. 붙임성도 좋아 사람들과 두루 친했다. 서로 인사는 안 하더라도, 총무와는 모두 친하게 지냈다.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았는데, 왠지 친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시원에 대한 내 인상은 꽤나 긍정적이었다. 저렴함과 편리함에 커뮤니티까지 갖춘 나름 근사한 주거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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