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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읽을거리/사회 & 역사

[관찰] 우리나라의 일제 전범기 과민증

by    2019. 10. 6.

더블전범기

욱일승천기 - 일제 군국주의와 침략의 상징이다. 피해자와 그 후손에게는 아픈 기억이다. 가해자에게는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이자, 떳떳하지 못한 자부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런 상징물을 일본 팀 응원이나, 제품 디자인, 혹은 일본과 유관한 단체의 상징 등으로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다만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욱일기의 방사형 패턴을 연상시키기만 하는 것을 보고도 "전범기 논란"이라며 과민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욱일기 디자인과 그냥 비슷한 디자인의 경계는 굉장히 애매하다. 욱일기와 얼마나 닮아야 부적절한 것일까? 형태 뿐만이 아니라 의도와 디자인의 주체도 중요하다. 여태 욱일기 논란을 보면서 느낀 내 마음속의 기준을 정리해 봤다. 

 

반박불가한 경우

진짜 할 말 없는 경우들

일본에서 일본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경우, 특히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나 국수주의적 성향을 동반하는 경우 매우 부적절하다. 일본 내의 단체의 상징이나, 운동경기 응원 등에 사용되는 경우, 일본 기업의 홍보물이나 로고 등에 사용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게다가 일본 해상/육상자위대 상징기가 모두 욱일기 디자인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앞으로 절대 바뀔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자위대에서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범기"문제의 가장 핵심이 아닐까? 그다음으로 일본 외에서 일본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 혹은 욱일기 디자인을 그대로 제품 등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그 역사적 상징성을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조금 억울한 경우들

변명은 가능한 경우

"욱일승천기"의 형태가 아닌 단순히 붉은 해와 방사형 빛줄기 디자인은 제국주의 일본 이전에도 흔히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제국주의 일본 이전부터 같은 디자인을 유지해 왔거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공예품, 미술품 등을 전범기로 매도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같은 예로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 역시 유럽에서 종종 사용되었던 디자인으로, 나치 독일 이전/이외의 경우에는 특별히 문제삼지 않는 게 보통이다. 다만 서구권에서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던 브랜드나 로고 등은 전후에 알아서 삭제했으니, 두 지역간 상황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부분.

로마 시대의 하켄크로이츠 / 1869년작 일본 목판화

그냥 억울한 경우

1) 그냥 방사형 패턴

위에서 보이는 프라이팬이나 하이트 맥주, 방사형 벽화, 앨범아트 등은 사실 일본과 연관도 없을뿐더러, 욱일기의 형태를 전부 보여주고 있지도 않으며, 색마저도 빨간색/흰색의 조합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연상"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비난하기에는 적절치 못해 보인다. 심지어 이런 방사형 패턴 자체는 일본 바깥에서도 워낙 자주 사용되어온 강렬한 디자인이라 모두 일제와 연관시키기는 힘들다.

 

2) 그냥 해 그림

우측 상단의 옷처럼 색깔도, 의도도 욱일기와 다른 경우. 이런 경우엔 역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 

 

3) 풍자를 위해 사용된 경우

위 중앙의 영화제 포스터는 공산주의 선전물 + 일본 제국주의 선전물 등을 혼합하여 익살맞은 효과를 의도했다. 욱일기 디자인이나 모택동 시절의 공산주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더라도, 그 의도가 일제 미화, 역사 왜곡 등이 아닌 당대를 풍자하는 의도를 가진다면 부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서방에서는 풍자적인 의도라도 나치 하켄크로이츠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피하는 편.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만, 일반적인 전범기 논란과 같은 논리로 비난하기에는 적절치 못해 보인다.

매우 적절한 사용례 (태평양전쟁 당시 디즈니 만화의 한 장면)

4) 대게

대게는 그냥 원래 그렇게 생겼다. 원래는 그렇게 붉지 않은데 인간이 쪄서 새빨갛게 된 것ㅠㅠ 다리부터 떼 먹어서 평범한 일장기로 만들어 주자.

나쁜 대게 / 착한 대게

5) 흡사하지만 유래가 다른 디자인

위의 "덤보" 포스터의 색 선정을 잘 보면 욱일기가 아닌 미국 국기에서 나온 디자인임을 알 수 있다. 비슷하게는 생겼지만 태생이 다르다. 

 

6) 역사의 한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경우

고증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경우다. 태평양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욱일기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문제삼을 이유는 없다.

+ "전범기"가 옳은 표현인가?

욱일승천기는 전쟁범죄를 범한 국가의 국기이다. 따라서 전범기다.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의 깃발도 전범기이다. 다른 전쟁범죄 단체 혹은 국가가 있다면, 그들을 상징하는 깃발도 "전범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욱일승천기는 전범기이지만, 전범기가 반드시 욱일승천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욱일승천기를 "전범기" 혹은 "일제 전범기"등으로 칭할 수 있지만, "욱일기" 또는 "욱일승천기"가 틀린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란을 방지하는 측면에서는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하지?

욱일승천기 - “전범기”에 대한 세계적인 인식을 바꾸는 일은 요원하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모두가 무감각해지기 전까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욱일기가 상징하는 아픈 역사에 대해서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부가 욱일기를 매개로 갖는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에 대해서는 계속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과도한 확대해석이나 무차별적인 매도는 지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닮았지만 맥락이 다른 디자인이나, 미묘하게 닮았을 뿐인 경우까지 너무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전범기 문제의 핵심은 역사 왜곡과 제국주의로의 회귀에 대한 잘못된 갈망이지, 그 디자인 자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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